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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직마운틴 2013. 3. 6. 02:06

도시 촌놈 이장이 되다.

 

 

         본채를 완성하고 2004년 봄에 세워진 원두막...

 

 

짙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에 드디어 태양초로 정성을 들인 고추로 고추장과 된장을 담갔다.

 

이곳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키운 고추로 장을 담근 것 이다.

 된장은 마을분들이 키운 무농약 콩을 사용 했다.

도시에서는 주로 대량생산한 소위 메이커를 사서 먹었다. 이제는 사서 먹는것 과는 이별 이었다.

장도 담그고 장작도 많이도 준비 했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함 이었다.

 

한가지 아쉬운것은 물 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였다는 것 이었다.

원수에서 300m를 호스를 타고 오느것은 문제가 아니었으나 동결 방지를 위해 땅속에 수도라인을 묻으려해도 바위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겨울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장을 담그고 겨울준비를 마치자 바로 추운 겨울이 닥쳤다.

지난해에는 일 하느라 계절에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대충 지나갔지만 일년을 지내고나니 어느정도 기후도 파악이 되고

그런대로 겨우살이를 잘 할 수 있었다.

눈은 자주 내렸고 산과 들은 흰 눈속에 파묻혀 겨울잠을 청했다.

 

드디어 2004년도 어느덧 저물고 2005년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겨울에 산속에서의 일과는 별반 크게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바지런을 떨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운동겸 장작도 패고 무엇인가 일손을 놓지 않았다.

눈이 오면 눈 치우는 일도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눈 양이 많은 날이면 하루종일 눈과 전쟁을 하였다.

 

1월의 어느날 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너무 많은 양이 한꺼번에 퍼 부으니 눈 치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눈은 하루종일 내리더니 그 다음날로 이어졌고 마침내 눈이 그쳤을땐 눈의 양에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줄자로 재어보니 80cm가 넘었다. 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가래를 급조하여 다니는 길만 교통로로 뚫어 놓았다. 차량운행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만약 식량이 떨어졌다면 굶어 죽기 딱 알맞았다.

하지만 식량은 미리 장만하여 풍부했고 생필품도 걱정이 없었다.

 

약 5일간을 고립되어 지냈다.

결국은 면에서 굴삭기를 이용해 쌓인 눈을 치워 주었고 드디어 고립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우리는 고립에서도 유유자적 눈속에서의 낭만을 즐겼다.

눈속에 파묻혀 사진도 찍고 눈썰매도 타며 오히려 신나는 어린시절로 돌아가 신나게 놀았다.

 

겨울철 매 끼니마다 식탁에는 김장 김치가 상에 올랐다.

우리가 농사지은 무공해 배추로 김장을 담아 땅속에 김장독을 묻어두고 끼니 때 마다 시원한 김장김치는

둘이먹다 한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깊은 맛이 있었다. 저녁상에는 구수한 전통 청국장에 여름에 말려 저장해 놓은

나물 반찬으로 식욕을 돋구었다. 시레기도 한몫을 단단히 했다.

 

가끔 장에 가는 날이면 간절임 고등어 한 손 사서 숯불에 구워 먹으면 정말 끝내 주었다.

건강식을 하고부터 몸이 아프거나 하는일이 거의 없었다.

도시에 살 때 아내는 거의 일년에 반은 감기를 달고 살았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감기는 커녕 몸살 한번 앓지 않고 건강을 유지 했다.

공기좋고 물 좋고 마음 편하니 병이 날리 없었다. 거기에 훌륭한 전통음식은 보약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눈속에 파묻혀 지내는 가운데 서서히 봄볕이 들기 시작 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이었다.

마을 회의가 있었고 그 자리에서 등떠밀리는 식으로 이장이 되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마을 분들이 짐을 지어 주신것 이었다. 걱정이 되었지만 마을 분들을 믿고

한번 해 보기로 했다.

도시 촌놈이 벼락출세를 한 것 이었다. ㅎㅎㅎㅎ...

그것도 이곳에 온지 3년만에 아니 실제 마을분들과 인사를 나눈지 만1년만에 감투를 쓰게 된 것 이었다.

감사 하기도 했지만 여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아침 식사를 끝내면 부리나케 마을회관으로 달려 갔다.

마을현황도 파악하고 숙원사업이며 농자재 문제 그밖에 여러가지 문제를 파악하며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농협에서 주관하는 팜스테이 마을에도 엄격한 심사를 거쳐 드디어 지정을 받았다.

한달에 한번 열리는 면 이장회의에도 참석해야 했다.

 

처음 이장회의에서 인사를 하던날....

13개리의 이장들이 모두 나를 쳐다 보았다. 처음보는 얼굴 이었고 행색을 보니 이곳 현지인은 아닌것 같고 요상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약간 머쓱하기도 했지만 인삿말로 대신하고 수인사를 나누었다.

이장 임명장도 면장으로 부터 수여 받았다.

이런것을 가리켜 출세를 했다고 해야하나... ㅎㅎㅎ...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이장생활을 시작 했다.

아침 식사후에는 당연한 것 처럼 마을회관으로 출근을 했다. 연치가 높으신 어른댁도 방문하고 홀로 사시는 독거노인들께도

찾아 뵈어야 했다. 또한 새로운 사업을 위해 우둔한 머리를 굴려야 했다.

하지만 농촌 지식이 없으니 걱정거리만 쌓여갔다.

내친김에 영농교육이며 기술센터를 자주 방문하며 농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기술센터(옛날, 농촌지도소) 에서 오가피를 마을별로 필요에 따라 신청하면 저렴하게 공급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전후 사정을 파악하고 마을에 작목반을 만들고하며 오가피 묘목 공급 신청을 했다.

지난해에 미리 신청한 마을을 선두로 묘목이 공급 되었다.

 

오가피 묘목을 공급받게 된 경우는 우연 이었다. 우선 마을을 둘러보니 묵은밭이 많이 있었다. 전에는 고추밭으로 사용하던 밭

이라 했다. 하지만 날이가며 주민들이 노령화 되다보니 경사가 심 하거나 힘들고 외진곳은 아예 농사를 포기 했다고 했다.

나는 그 점에 착안해 한번 심어놓으면 번거롭지도 않고 손을 따로 보는 불편도 없으며 열매는 고추농사보다 2배 이상의 소득을

올릴수 있다는 생각에 더구나 필요에 따라 뿌리며 줄기 잎등 모두 약재로 쓸 수 있는 효율성에 마을분들을 설득하여 대체작목으로

오가피 농사를 권유했고 마을사람들의 찬성에 묘목을 공급 받게 되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열매는 유명한 주류회사에서 오가피주를 생산하는 원료로 전량 수매한다고 하니 조건도 더없이 좋았다.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씩 동참을 하게 되어 총 9가구가 신청을 하였다.

 

몇년전에 국가에서 대체작물을 선정하여 주민들에게 고소득을 올릴수 있다고 설득하는 바람에 몇가구가 대체작물을 심었다가

손해만 보았다고 했다. 그런적이 한두번이 아니라고 하였다. 아직도 그 여파로 고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 마을 사람들이 시큰둥 했던 것 이었다.

하지만 문외한이긴 해도 이번 기회는 큰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제대로만 하면 고소득을 올릴 수도 있고 안된다고 해도 약재등 얼마든지 판로가 있었다. 더구나 놀고 있는 밭이니 손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은 오가피를 공급받아 손을 빌려가며 묵은땅에 정성껏 심었다.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아침식사를 마치면 저녁때 집에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 였다.

집에는 아내만 혼자 집을 지키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가 일쑤였다.

서서히 고민이 되었다.

 

 

 

 

정선 산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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